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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김영하, 오직 두 사람 : 완의 생각

완WAN完 2023. 8. 6. 01:37

오직 두 사람

김영하 작가 소설집 가장 첫 번째 소설

272쪽
 
//보게 된 계기

친구의 추천으로 운 좋게 김영하 작가님을 알게 됐다.
이 분의 성함은 모르더라도 '살인자의 기억법'은 꽤나 오래 쓰인 숙어처럼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나도 그저그런 변두리 팬이었나 보다.
 
이 책에는 김영하 작가님의 단편 소설 일곱 작이 들어있다.
오직 두 사람, 아이를 찾습니다, 인생의 원점, 옥수수와 나, 슈트, 최은지와 박인수, 신의 장난. 

 
 
//작가 소개



김영하 작가
대한민국의 소설가
1990년부터 하이텔 등 PC통신을 통해 집필 활동을 시작하여,
1996년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제1회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며 큰 명성을 얻었다.
대표작으로 《검은 꽃》(2003), 《살인자의 기억법》(2013) 등이 있다.

 
//세줄 감상
세밀하고도 섬세하게 녹록찮은 현실을 고발한 그의 소설들은 수많은 물음표와 느낌표를 던져준다.
물음표는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심심찮게 곱씹을 수 있는 다과이며 느낌표는 목이 막히지 않도록 옆에 얼음과 한컵 부어둔 사이다같다.



//간직하고 싶어

아이를 찾습니다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불행에 짓눌린 인간의 냄새를 용케도 잘 맡았다.
중략
사람들은 밝고 명랑하고 활기찬 사람과 함께일 때 미구에 다가올 위험에도 더 잘 대비할 수 있는 것처럼 느꼈고,
57페이지

힘이 들다는 말을 내뱉어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 인간이라면 고개가 자연스레 끄덕 일터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앞의 그대는 알고 있다.  그것은 공감과 같은 낙천적인 여유가 아니라 철저한 냉혈의 눈빛으로 1초짜리 스캐닝이 끝난 이후의 안면 근육 운동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럴 것이다.  우울증으로 병원을 전전하는 사람보다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리더십 있는 사람과 더 함께하고 싶다.  
그러나 작가님의 표현은 가정으로 끝난다.  '더 잘 대비할 수 있는 것처럼 느꼈고, ' 사실은 모르는 일이라는 것일까. 
안타깝다. 죄는 그 누구나 지었고 그 누구도 짓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살아간다. 그렇게 세대는 거듭된다.
아들의 아들은 아들의 아들보다는 생명이고 자식으로 느껴진다.  자식,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닌, 우리가 하느님의 자식인 것과 같은 자식말이다.  쓸쓸한 덤덤함을 말하고 싶었을까.
 


옥수수와 나

"섹스 파트너와 뭔가를 교환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  나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중략
나와 그녀는 뭔가를 교환하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낭비하기 위해 만나는 거야.  우리는 시간과 에너지를 함께 소비하지.  그러나 궁극적으로 낭비하는 것은 바로 섹스라는 관념이야.  '나는 섹스를 한다'는 무거운 관념을, 덤프트럭이 모래를 쏟아놓듯 훌훌 던져버리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
129페이지
감히 같은 인간의 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아름다운 나신이 내 옆에 누워 있었다. 
155페이지
너의 그 무거운 관념이 과연 가볍고 빠른 총알도 이길 수 있을까?
168페이지

근래 뛰어들었던 소설 중에 가장 재미있었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재밌었다. 영화가 된다면 어떨까 싶을 정도다.  방금 알게됐는데, ‘김영하의 소설 [옥수수와 나] 연구’ 라는 제목의 저널도 있다. (궁금하다면 DBpia에서 읽어보시길…)
어찌됐건 옥수수와 나는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잘못된 철학을 학과 가방끈으로 진리라 추앙하는 철학과 교수와 그의 몰상식한 행동들,
너무나도 많은 갈래의 결말을 파생시킬 수 있는 마지막 페이지와 상상 속의 아름다운 여인이라.

155페이지에서 들고온 문장은 표현이 흥미로워들고왔다. 나신이라니.

168페이지의 질문에 답을 해보자. 나는 무거운 관념이 민첩할 수 없을만큼 무겁다면, 가볍고 빠른 총알은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라 믿는다. 허나 철학의 무거운 관념은 무거운 껍데기에 둘러쌓여 본질은 밀도가 낮아 기체 상태에 놓여있는 미량의 사량만 남아 있을 것이라 총알 따위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 생각한다. 총을 아무리 쏘아도 그의 알량함은 그의 명줄을 지켜줄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병아리에 쫓기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옥수수니까.

이것이 핵심일까. 모순으로 가득찬 세상, 모순만이 살아남는 세상.



최은지와 박인수

파티션 사이를 걸어가는 최은지의 뒤로 남자 직원들의 시선이 얽히는 것을 자주 봐왔다. 
중략
말수가 적고 요염한 기운을 풍기는 여자들은 회사에서 곧잘 왕따가 된다. 
205페이지
"그러니까 개수작이지.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타인에게 개수작을 하는 인간들이 있어.  잔잔한 호수만 보면 돌을 던지는 어린애들처럼. "
210페이지
"그냥 감당해.  오욕이든 추문이든.  일단 그 덫에 걸리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인생이라는 법정에선 모두가 유죄야. "
242페이지


최은지, 말수가 적고 요염한 기운을 풍기는 여자라, 사실 남여 모두에게 해당되는 설명이다. 이제 막 회사 생활을 시작한 나로써는 모르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사회라는 통념 속, 모든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개념일 것이다. 말수가 적고 요염한 기운이라. 도화살의 일종 일 수 있을까. 집단 속, 남녀불문 아무 이유가 없어도 주변 이성이 사족을 못쓰는 그림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한 기묘한 부분에 대해 콕찝어 소재로 사용한 지점이 흥미거리였다.

아무 이유도 없이 타인에게 개수작을 하는 인간들, 분명히 존재한다. 나 또한 그랬던 적이 있으니까. 내가 즐겁기 위해 불특정 인물에게 개수작을 했다면 이유가 있는 것인가. 유희? 우울? 어떤 것에서 기인됐건 이유가 있었나보다. 그렇다면 아무 이유도 없이 타인에게 개수작을 하는 인간이라. 개수작일 것이라 생각지도 못하고 행했던 것들이 특정사람에게 칼날의 형상을 한다면, 그럴까.
이와 비슷하게 고민했던 것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미국 시리즈물 ’Friends’ 에서 가장 희안한 캐릭터 피비가 남긴 최대 명언이 있다. 바로 ‘Selfless Good Deed’에 관한 것이다.
Selfless good deed : Any good deed done toward your fellowman that is done without any form of recognition to yourself
직역하자면 ‘자신이 없는’ 선행인데, 자신에게 이득되는 것은 없고 타인에게만 이득이 되는 선행을 말하는 것이다. 피비의 친구, 조이와 피비는 근원적인 문제를 두고 서로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세상에 selfless good deed은 존재하는가?
피비는 존재한다는 가정을 증명하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이때 했던 모든 선행들로 하여금 자신의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어떨결에 자신에게 이익이 생긴다거나하는 상황과 맞물려 흐지브지 조이에게 밀리고 만다.
이것은 Egoism과Altrusim을 두고서 논의할 시사거리이다.
다음에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이 것에 대한 심도 깊은 노의를 시도하겠다.

그렇지만 표층만 핥아보았을 때, 수박 겉을 핥는 것보다는 자극적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내게 이득이 되지 않는 선행은 불가능하다.
인간실존의 문제와 직결되기도 한다.
한가지 근접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행동이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환상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 한몸 받치는 영화 속 장면이다.
대개는 결국에 산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 할 때,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인 사랑 실현에 기인된 만족감 혹은 성취감을 얻는다. 일말의 이기적인 이득을 취하는 상활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함께 고민해보시길 바란다!

인생이라는 법정에서는 모두가 유죄다. 정말 그렇다. 수십번을 곱씹어보아도 나오는 침물은 똑같은 맛을 낸다.
어제는 지인과 유의미한 대화를 나눴다.
나는 신은 인간을 벌주는 존재가 아니라 굳게 믿는다. 그녀는 그녀의 신은 모두에게 공평하리라 믿는다.
얼핏 보면 표층적으로는 모두 맞는 말 같다.
허나 나의 말은 기대이며 후자는 믿음이다.
신이란 무엇인가, 오강남 교수님의 ‘오강남의 생각’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보여주는 신에 대한 사랑과 그 개념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
신은 모두에게 공평하리라는 믿음으로 하여금 불쌍한 상처 투성이 나의 구원을 꿈꾼다.
신은 인간을 벌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하여금 죄 많은 나의 구원을 꿈꾼다.
그렇다 구원을 꿈꾼다.
신은 구원을 해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둘다 틀렸다고 볼 수 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죄가 지은 자는 용서를 바라며 죄를 당한 자는 죄인의 용서를 끔찍이도 원하지 않는다.
사랑의 실천을 용서에서 시작될까.
죄인에 대한 용서는 궁극에는 자신을 향한 사랑, 자기애의 실천에 가담한다.
그렇다. 인생이라는 법정에서는 모두가 유죄다.
상처 주지 아니한 자 없으며 상처 받지 아니한 자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죄를 짓고, 상처를 받고 용서를 하기도 하고 구원을 바라기도 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내 앞의 생이라 누구하나 원망하고 탓할 것 없이 살아간다.



신의 장난

나는 우울을 믿어.  인간은 천둥이 치고 비가 퍼붓는 궂은 날씨에는 울적하도록 진화했어.  가만히 동굴에 틀어박혀서 날씨가 좋아지길 기다리는 게 유리하거든. 
중략
인류가 이렇게 진보한 건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끝없이 자신의 과오에 집착해 온, 나 같은 우울증 환자들 덕분이야. 
그들은 헛된 희망을 품지 않아. 스스로를 과신하지도 않고. 
260페이지

 
신의 장난은 사실 영화화된다면 오락 영화로써 아주 재미난 작품이 될 것 같다. 소위 넷플릭스 재질이랄까.
이 소설을 읽을 때 우울한 감이 없지않은 내 마음을 품고서 고개를 과감하게 끄덕이며 페이지를 넘겼다.
어쩌면 그 때 내 앞에 닥친 상황과 그로부터 기인된 우울을 정당화 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요소였을지도 모르겠다.
천년 만년 대립하겠지만, 헛된 희망이 인류가 달에 닿을 수도, 버스에서 블로그를 쓰고 있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인지도 모른다.